[Tasting Note] 2019 Chapelle Saint Theodoric Le Grand Pin
르 그랑 팽 2019 – 남부 론의 섬세함을 마시다

이 블로그는 애주가로서, 술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주관적인 시선으로 가감 없이 기록하는 공간입니다. 때론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때론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한 기록이 될 수도 있지만, 한 잔의 술이 주는 감동을 온전히 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의 한 잔. 시작해보겠습니다.
Chapelle Saint Theodoric – 샤펠 생 테오도릭
샤펠 생 테오도릭은 2009년 첫 빈티지를 선보인 비교적 신생 도멘이지만, 그 존재감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새로운 도멘’이라기보다, 전통적인 남부 론의 규범을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실험적이고 철학적인 와인메이킹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도멘은 도멘 드 크리스티아(Domaine de Cristia) 의 오너 밥티스트 그랑종(Baptiste Grangeon) 과,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수많은 컬트 와인을 발굴한 전설적인 수입업자 피터 베이강트(Peter Weygandt) 가 만나 탄생했습니다. 두 사람은 샤토 하야스(Château Rayas) 와 유사한 모래 기반 테루아에서 영감을 받아, 순수 그르나슈로 섬세하고 투명한 와인을 만들어보자는 목표를 공유했고, 그렇게 샤펠 생 테오도릭이 시작됐습니다.


“Rayas 스타일에 대한 현대적 오마주”
샤펠 생 테오도릭이 가장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Château Rayas 를 연상시키는 맑고 섬세한 그르나슈 스타일을 남부 론에서 구현해낸다는 점입니다. 진득하고 강한 타닌, 짙은 과실의 전형적 샤토뇌프 뒤 파프와 달리, 이들은 훨씬 더 부드럽고 우아하며, 깊은 투명성을 지닌 와인을 만듭니다.
- 100% 고령 그르나슈
포도나무 수령은 50~100년에 달하며, 이는 깊이 있는 뿌리와 균형 잡힌 양분 섭취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 모래 토양 중심의 포도밭
샤토 하야스와 유사한, 물 빠짐이 좋고 산화적 스트레스를 줄이는 토양. 가벼운 질감과 미네랄리티를 갖춘 와인을 만들어냅니다. - 비오디나믹 농법 + 최소 개입 철학
모든 포도는 비오디나믹 방식으로 재배되며, 인공적인 요소나 과도한 기술介入 없이 자연 그대로의 발효와 숙성이 추구됩니다. - 콘크리트 통 발효, 데미뮈드 숙성
현대적인 기술 대신 전통적인 방식으로 와인을 양조하며, 숙성은 600L 데미뮈드 오크통에서 이뤄집니다. 이는 오크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포도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한 선택입니다. - 비탈착형 발효 방식
특히 라 기가스의 경우 줄기를 제거하지 않고 송이째 발효하는 방식으로, 복합성과 타닌 구조의 자연스러움을 극대화합니다.


왜 특별한가?
샤펠 생 테오도릭은 샤토뇌프 뒤 파프라는 전통의 땅에서, 뚜렷한 개성을 가진 ‘타입이 다른 와인’을 제안합니다.
이들이 만드는 르 그랑 팽(Le Grand Pin)과 라 기가스(La Guigasse)는 모두 ‘힘’보다는 ‘결’에 집중합니다. 마치 블랙커피가 아닌, 잘 내린 루이보스차 같은 느낌. 농익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정제된 사유의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주요 와인 라인업
샤펠 생 테오도릭은 3가지 레드 와인을 생산합니다. 모두 100% 고령 그르나슈(Grenache) 품종이며, 바이오다이내믹 방식으로 재배된 포도만 사용합니다.



- Les Sablons
입문자용 와인. 젊은 포도나무와 프레스 와인을 블렌딩해 만든 부드러운 스타일. - La Guigasse
라 기가스 리외디의 모래 토양에서 자란 50~100년 수령의 그르나슈. 송이째 발효 후 데미뮈드 숙성. - Le Grand Pin (르 그랑 팽)
오늘 소개할 이 와인! Pignan 리외디에서 자란 최고 수령의 그르나슈만 사용. Chateau Rayas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우아함과 미네랄리티가 뛰어납니다.
2019 Le Grand Pin – Tasting Note
첫 인상
잔에 따르면, 강렬한 루비 컬러가 인상적입니다. 테두리는 살짝 밝은 황토색을 띠며, 어느 정도 숙성이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눈물에는 색이 곱게 물들어 있고, 점도는 중간 정도로 보입니다.


향
잔을 돌리자마자 피어오르는 향은 생생한 붉은 과일 중심입니다.
체리, 라즈베리, 석류 같은 산뜻한 과일향과 함께, 바이올렛, 로즈마리, 가리그 허브 특유의 론 지역 향취가 배경을 은은하게 채웁니다. 향 자체는 복합적이기보단 섬세하고 정제된 느낌.

맛
가장 놀라운 점은 입에 넣자마자 느껴지는 가볍고 생기 있는 터치감입니다.
알코올 도수가 무려 15.5도임에도 무게감보다는 신선함과 섬세함이 앞섭니다. 체리 중심의 과즙감, 상큼한 산미, 실키한 타닌이 고르게 퍼지며, 입 안을 붉은 과일의 활기로 가득 채웁니다.
뒤이어 느껴지는 톡 쏘듯 맑은 산도와 깨끗하고 정제된 피니시는 이 와인의 핵심 미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도는 거의 없지만, 마치 체리 파이 속의 달콤한 과일 풍미가 응축되어 있는 듯한 인상도 남습니다.
시음 초반에는 활짝 열려 있었던 와인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닫히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시음 적기에 갓 접어든 상태여서 그럴 수 있습니다.



총평
2019년 빈티지의 Le Grand Pin은 남부 론의 전형적인 진득함보다는 샤토 하야스(Château Rayas) 를 연상시키는 듯한 우아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샤펠 생 테오도릭이 이처럼 섬세하면서도 깊이 있는 와인을 만들어낸다는 점은 분명히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지금 마셔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몇 년 더 숙성시킨다면 더욱 입체적인 부케와 구조감을 보여줄 가능성이 큽니다. 개인적으로는 2027~2029년 사이에 다시 마셔보고 싶은 와인입니다.
와인 정보 정리
| 와인명 | 2019 Chapelle Saint Theodoric Le Grand Pin |
| 생산자 | Chapelle Saint Theodoric |
| 지역 | France / Rhône Valley / Southern Rhône / Châteauneuf-du-Pape |
| 품종 | Grenache 100% (고령 포도나무) |
| 알코올 도수 | 15.5% |
| 음용 온도 | 15.5℃ |
| 디캔팅 | 약 1시간 (젊은 빈티지 기준) |
| 페어링 | 육류 요리 전반, 아시아 요리, 참치, 버섯, 가지 요리, 치즈 등 |

마무리하며
2019 Le Grand Pin은 아직 국내 시음 후기가 거의 없어 더욱 궁금했던 와인이었습니다. 직접 마셔보니, 평소 우리가 기대하는 남부 론 와인의 이미지와는 다른, 은근한 매력과 고요한 긴장감이 공존하는 와인이었습니다.
혹시 이 와인을 경험해보신 분이 있다면, 여러분의 시음 노트도 함께 공유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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