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건한 바이올렛의 향연, 에르미따쥬 두 픽상루 2019 기욤 고셈
이번에 마신 와인은 프랑스 랑그독 지역의 보석 같은 와인, 에르미따쥬 두 픽상루 2019 기욤 고셈(Ermitage du Pic Saint Loup 2019 Guilhem Gaucelm)입니다.
이 와인은 이름부터 인상적입니다. ‘에르미따쥬’라는 단어가 론 지역의 유명한 산지와 겹치지만, 여기에 ‘픽상루(Pic Saint Loup)’라는 지명이 붙으며 랑그독의 또 다른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한때 ‘Ermitage’로 쓰이던 스펠링이 최근 ‘Hermitage’로 바뀐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혼동을 피하고 자신들만의 뿌리를 더욱 분명히 하려는 의도겠죠.

와인 산지와 떼루아
기욤 고셈은 고도가 높은 랑그독의 픽상루에서 생산되며, 이 지역은 낮에는 햇볕이 작열하지만 밤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 포도에 균형과 섬세함을 더해줍니다. 특히 90년 이상 된 포도나무들이 고블렛 방식으로 재배된다고 하니, 그 깊이와 집중감은 말 안 해도 예상할 수 있겠죠.
블라인드 시음 - 그 첫인상
이번 시음은 블라인드로 진행되었는데요, 잔에 따라내는 순간 선명한 보랏빛 루비 컬러가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코어는 투명하면서도 깊고, 잔을 돌리면 굵고 느린 눈물이 색을 머금은 채 또렷이 흘러내립니다.
향에서는 붉은 체리와 검붉은 자두의 달콤한 과실향이 퍼지면서도, 강렬하고 싱그러운 제비꽃 향기가 한가득 피어오릅니다. 마치 젊은 귀족 부인이 자신만만하게 걷는 듯한 기품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입안에서의 인상
입에서는 코에서 느꼈던 달콤함이 사라지고, 대신 적당한 타닌과 산도, 그리고 농축된 과실의 힘이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오크 터치는 은은하게 깔리며, 버섯이나 가죽 같은 얼시함이 조심스럽게 뒤를 따릅니다. 단순히 과일 향만 강한 와인이 아니라, 강건함과 섬세함 사이를 오가는 깊은 내면을 가진 와인이었어요.
마시는 내내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고, 한 모금 한 모금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진짜 ‘즐거운 시음’이었습니다.

와인을 공개하고 나니…
와인을 공개하고 보니 바로 기욤 고셈. 그 이름에 놀랄 것도 없이, 그동안 주위에서 “가성비 끝판왕”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바로 그 와인이더군요.
품종은 그르나슈 50%, 시라 50%의 블렌딩. 시라나 GSM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은 했는데, 끝까지 정확히 맞추진 못했어요. 그래도 블렌딩 비율을 알고 나니 그 구조감과 조화로움이 더 이해가 되더라고요.
강한 시라의 백본 속에서도 그르나슈의 붉은 과실 향이 결코 밀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와인의 시라가 그만큼 강렬했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그에 밀리지 않는 그르나슈라니… 역시 멋진 블렌딩입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와인
몇 년만 더 숙성된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성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이 듭니다. 이미 훌륭했지만, 이 와인은 아직 자신만의 정점을 향해 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줄 평
강건한 바이올렛의 향연.
입과 코에서 퍼지는 그 인상은 와인 한 병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예술 중 하나였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멋진 와인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안녕히 계세요!